여주는 조선의 숨결이 살아 있는 도시다. 그 중심에 세종대왕릉(영릉, 英陵)이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성군 세종과 그의 곁을 지킨 소헌왕후 심 씨가 함께 잠든 곳이다.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은 썬밸리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마치고 시작됐다. 체크아웃 후 출렁다리를 지나 단풍이 물들었다는 세종대왕릉으로 향했다. 블로그에서 본 사진처럼 붉고 노란빛이 이미 절정을 맞이한 듯했다.

세종대왕릉으로 가는 길
출렁다리에서 차로 13분 멀지 않은 거리였다. 도착하자마자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다행히 만차는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자리를 찾았다.
입구로 향하는 길은 이미 가을 색으로 가득했다. 노랗게 물든 잔디와 붉게 물든 단풍나무에 입구부터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영릉도 세계유산이었구나...'

짧은 감탄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입장료는 500원. 하지만 궁능 무료 개방 기간(10/29~11/9)이라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싸고 무료라서 좋은데 잘 관리하려면 입장료고 좀 더 비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붉은 단풍이 만든 가을의 정원
입구를 지나자마자 단풍이 본격적으로 보였다. 군락을 이룬 단풍은 아니었지만, 길을 따라 한 그루씩 물든 나무들이 걷는 내내 시선을 붙잡았다. 사진을 찍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단풍을 한 그루씩 구경하다 보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과학 기구를 만나게 된다. 측우기, 해시계, 자격루 등 교과서에서 보던 바로 그 기구들이다. 조선시대에 이렇게 많은 과학 기구들을 만들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 같다.

재실과 작은 책방
다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재실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왕릉을 관리하던 제관이 머물던 곳. 지금은 새로 단장되어 깔끔한 한옥 건물의 형태다. 다만 지나치게 보수되어 오히려 세월의 흔적이 사라진 듯한 점은 아쉬웠다.

재실을 지나면 작은 책방이 등장한다. 이곳은 옛 재실 공간이다. 책방은 조선 시대 출판과 인쇄를 담당했던 관청 이름에서 따온 것. 방문객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 공간이 바로 이 작은 책방이다. 창가에는 의자와 책상이 있어 책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사람보다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더 많다.

영릉의 중심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작은 인공 연못이 나타난다. 크기에 비해 수심은 2m 정도로 얕지 않다. 물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어느덧 붉은 문인 홍살문이 보인다. 왕릉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입구다. 그 너머로 벽돌로 만든 길이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이 길이 바로 '어로(御路)', 임금이 향로를 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걸었던 길이다.

길 끝에는 제향 공간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뒤쪽 언덕 위로 바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든 합장릉, 영릉이 자리한다. 능 앞에는 상석과 문인석, 망주석 등 조선 왕릉의 전형적인 석물이 놓여 있다. 직접 봉분으로 오를 수는 없지만 둘레길을 따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옛 선조 그것도 왕의 릉을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돌아오는 길: 단풍의 절정
정자각을 지나 돌아오는 길에 메인로 대신 옆길을 택했다. 그 선택이 탁월했다. 단풍나무 네댓 그루가 모여 붉은 터널을 만든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짧은 구간이지만 마치 세종이 다스리던 시절의 가을 풍경이 그대로 재현된 듯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입구 쪽 카페 스승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시그니처 음료 두 개를 주문했다. 여 특산물인 땅콩을 넣은 땅콩크림라테 그리고 솔잎 영릉에이드. 음료 맛이 특별히 강렬하진 않았지만, 한 시간 넘게 걸은 뒤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했다.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
여주 세종대왕릉은 조선의 정신, 세종의 업적, 그리고 자연의 순환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이다. 봉분 하나 아래 왕과 왕비가 함께 잠든 합장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서도 드물다. 능의 배치는 풍수적으로 완벽한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평가받으며 주산인 북성산이 뒤를 감싸고 남한강이 능을 휘돌아 흐른다. 청룡과 백호의 산줄기가 능을 보호하는 형세라 왕릉 자체가 자연의 품 안에 있는 듯한 안정감을 준다.
왕릉을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방문은 예상보다 훨씬 따뜻했다. 자연이 주는 평온함과 역사가 주는 경외감이 조화된 공간. 그 안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이 다시금 떠올랐다. 가을의 세종대왕릉은 단풍으로 완성된다. 11월 여주에 오게 된다면 빨강과 노랑이 겹쳐진 든 세종대왕릉을 방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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