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우붓 숙소에서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사실 거의 못 자고 일어났다는 게 맞는 표현. 여행지에서라면 평소보다 더 쉽게 눈이 떠지는 법. 편안하게 자도 되겠지만 늦게 일어나면 바투르 산 블랙 라바 지프투어와 루왁 커피 농장 방문 미션 실패. 잠을 잘 수 없었다.
추울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18도면 한국 가을 날씨잖아' 하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산길을 오픈 지프로 오르자 바람이 칼처럼 스며들었다. 타월 하나를 아내와 함께 덮고 덜덜 떨며 올라가는데 그 순간만큼은 “아... 왜 이 투어를 신청했을까. 싶었다. 해가 떠오르자 모든 불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라운 일출 풍경 앞에 추위쯤은 양념.
바투르 산 지프투어: 칼바람과 별빛 그리고 일출
어둠 속에서 지프들이 줄지어 산을 오르던 장면은 아직 생생하다. 마치 은하수로 향하는 행렬 같았다.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산길을 하나하나 밝혀주었다. 옆을 보면 까마득한 어둠 속 골짜기 위를 올려다보면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하늘. 이 낯선 대비가 오히려 묘한 설렘을 자아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지프 기사는 차를 능숙하게 돌려 주차했다. 바로 옆이 절벽인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나 같으면 손에 땀이 흥건했을 텐데 이들에게는 일상이겠지. 덕분에 발리의 새벽을 가장 높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는 단출했다. 식빵과 과일, 그리고 미지근한 음료. 평소 같았으면 '이게 뭐야' 했을 텐데 그 순간에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배고픔도 부족한 메뉴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과 일출을 기다리는 설렘에 묻혀버린다.
마침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고 바투르 호수 위로 햇살이 번져나가는 순간. 사진으로 수십 번 본 풍경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찬바람과 함께 온몸으로 느끼는 빛과 색. 피곤함, 올라오면서 견뎠던 추위, 적막함 속 기다림 이 모든 것이 이 감동을 위한 복선과 같았다.
이곳의 묘미 중 하나는 사진. 가장 높은 곳에서 일출과 함께 사진 남길 수 있다는 건 행운과 같았다. 지프 기사는 사진사가 되어 멋진 사진들을 찍어주었다.
※ 바투르 산: 해발 약 1,717m의 활화산. 정상에 오르면 바투르 호수와 인근 아궁산 등이 펼쳐진 압도적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블랙 라바: 달 표면 같은 검은 대지
일출을 충분히 즐긴 뒤 지프는 블랙 라바로 향했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데도 여전히 몸을 스치는 바람은 매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해가 떠서 공기 속에 온기가 배어 있었고 마음도 한결 여유로웠다.
눈앞에 펼쳐진 블랙 라바. 온통 검은색의 바위와 모래가 끝도 없이 이어진 풍경은 마치 다른 행성 같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달 표면이나 화성 탐사 사진이 눈앞에서 있는 느낌이었다.
지프 기사들은 저마다의 포토존에 차를 세웠다. 지프에서 내린 사람들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 포즈를 취하거나 현무암 지대를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고 있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싶지만 어딜 찍어도 그림 같은 배경에는 사진이 답이다. 많이 찍는 게 남는 법.
다시금 지프 기사의 사진 실력이 빛을 바란다. 단순히 지프를 모는 운전기사가 아니었다. 카메라만 들면 순식간에 전문 사진작가로 변신한다. 사진 구도, 타이밍, 심지어 포즈 제안까지 척척.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본업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인생샷을 여러 장 건졌다.
바투르 산과 또 다른 블랙 라바의 매력. 사진이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사진을 보면 그날의 감동이 다시 생각난다.
※ 블랙 라바: 바투르 산의 화산 폭발로 유출된 용암이 굳어 형성된 흑색 암석 지대
Cantik Agriculture 루왁 커피 농장: 커피의 색다른 세계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Cantik Agriculture Luwak Coffee 농장. 블랙 라바에서 픽업 기사의 차로 갈아타고 조금 달리니 농장에 도착했다. 화산 대지의 검은색을 뒤로하고 맞이한 푸른 풍경이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졌다.
입구에는 커피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실제 수확용이라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에 가까웠지만 가이드의 설명이 흥미로웠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의 잎과 열매 차이를 눈으로 직접 보니 단순히 이름만 알던 커피가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전통 방식의 로스팅 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팬에 커피콩을 넣고 손으로 볶아내는데 연기와 함께 퍼지는 향이 진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가이드는 모든 원두를 현대적인 로스터기가 아닌 전통방식으로 로스팅한다고 했다. '정말일까?' 약간 의심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루왁 커피. 사향고양이가 먹고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든다는 독특한 과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향고양이와 그들의 배설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투어가 끝나고 커피 시음 시간. 13종의 시음은 무료다. 다만 루왁 커피는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이곳 커피는 커피 가루를 뜨거운 물에 직접 풀어 마시는 방식. 필터의 깔끔함 대신 거침이 느껴진다. 입안에 커피 미분이 낯설었지만 '체험의 일부'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시음용 13잔은 대부분 너무 달았다.
그리고 주문한 루왁 커피. 솔직히 맛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라 불렸지만 이제는 더 풍부한 맛을 가진 원두들이 많아졌다. 이 가격이면 게이샤가 훨씬 매력적이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루왁 커피 농장에서 루왁 커피를 직접 마셔봤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기념품처럼 느껴졌다.
루왁 커피 한 잔을 나눠 마신 뒤 원두 200g을 구매했다.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발리에서의 기억을 집으로 가져간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커피 한 모금에 떠오를 발리의 추억을 생각하니 그 값어치는 충분했다.
발리 루왁 커피 농장 투어: Cantik Agriculture Luwak Coffee (캔틱 루왁 커피 농장)
발리 지프차 투어로 바투산 일출에 이어 루왁 커피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저를 위해 아내가 준비한 코스였습니다. 커피 농장을 관광 상품화한 곳이었습니다. 커피 농장의 진면
hobby.theawesomewaves.com
※ 커피 농장을 단독으로 가기에는 동선 낭비가 크다. 다른 투어에 포함시켜 가보는 걸 추천.
여행 팁
바투르 산 일출 투어는 사륜 구동 지프를 타고 바투르 산과 주변 지역을 1.5 ~ 2시간 동안 방문. 실제 투어 시간은 짧지만 이동 및 준비 시간 때문에 우붓 지역에서는 새벽 2시 30분 ~ 3시 사이에 픽업. 타 지역에서는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가격은 35 ~ 40 달러 정도로 투어 업체마다 비슷하다.
⊙ 바투르 산 일출 투어에는 두꺼운 외투는 필수. 체감온도는 생각보다 훨씬 춥다.
⊙ 업체마다 올라가는 지프 구역이 다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일출을 보고 싶다면 예약할 때 꼭 확인할 것.
⊙ 블랙 라바 지대에서는 흙먼지가 많으니 편한 복장과 튼튼한 신발을 권한다.
⊙ 루왁 커피 농장에서는 맛있는 커피가 아닌 재미와 추억을 기대하자. 발리 시내에서도 루왁 커피는 쉽게 접할 수 있으니깐.
⊙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른 액티비트를 조합하는 것도 좋다.
바투르 산 지프투어는 쉽지 않았다. 새벽 기상, 차가운 공기, 단출한 아침. 그러나 일출을 보는 순간 모든 불편이 사라졌다. 블랙 라바에서의 색다른 풍경 그리고 루왁 커피 농장에서의 커피 체험까지. '발리 여행 중 단 하나의 투어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바투르 산 지프투어를 선택하겠다. 단, 커피는 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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